김동현
1. 명당인 생가
신미대사는 신라 45대 신무왕의 넷째 왕자공 익자광자(益光)의 후손 영산(영동)김씨 관조이신 영자이자(令貽)의 고손(5세손)으로 증조부가 고려조 판도판서 영산부원군 길자원자(吉元)이며 조부는 조선조 의정부 우찬성 종자경자(宗敬-찬성공)이고 부는 이종무와 대마도 정별에 큰 공을 세웠고 예문관사 숭문관사 춘추관사 관상감사 세자사 영산부원군을 지내신 훈자(訓)의 4형제 중 장남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상룡리(괴골-서당골)에서 태어났으며 생가 터인 상룡리 괴애골(서당골)에 집터를 잡을 때부터 범상치 않는 일이 있었다 한다.
조모(정경부인 경주김씨)의 상을 당하여 유명한 지관에게 부탁하여 명당을(한곡리 재양골-재상골) 얻어 장례를 치르는데 박장으로 모시라는 지관의 말에 명심하여 개토를 하니 판판한 암반이 나와 고심을 하다 틈새를 이용하여 넓적한 바위를 들추는 순간 세 마리의 큰 벌이 안쪽에 붙어 있다가 그중 한 마리가 날아가서 당황하고 있으니 지관이 황급히 와서 저 벌이 가는 곳을 찾아가서 집터를 잡으면 다음 대에 큰 인물이 날것이다 하여 하인을 시켜 그 벌이 앉은 곳이 상룡리 괴애골로 그곳에 새 집을 짓게 되었다.
북쪽이 막히고 동남쪽이 확 트였으며 바로 앞에 바릿대산(鉢峰)이 있고 동쪽에 백화산이 바라보이는 전망 좋고 마음에 드는 명당자리에 터를 딲아 상기둥을 중심으로 사방에 기둥을 세워 집의 틀이 되어 부원군이 기분 좋은 끝에 밤이 되어 곤히 잠이 들었을 때 악몽을 꾸었다. 험상궂은 장정이 나타나서 “너 이놈 이 곳은 나의 터전이거늘 어찌하여 네놈이 이곳에 집을 짓느냐” “당장 날이 밝는 대로 중지하고 썩 물러가라 내 말을 뜯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이다” 하고 사라진다. 악몽에 잠을 깨고도 첫날부터 기분이 상하여 깊은 생각에 잠기었으나 다음날 대들보를 얹고 서까래를 걸치고 산자를 엮으니 집 모양이 되었다.
그날 밤 잠에 그 장정이 또 나타났다. “내 말을 헡으로 듣느냐? 내일 당장 집을 뜯지 않으면 너의 큰 아들을 잡아 가겠다. 정신 차려라” 하고 사라진다. ‘이상하다 이놈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집착을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기며 날이 밝았다. 이게 웬일이냐 어린 큰 아들이 새벽에 세상을 떴다. “정말 이구나” 한탄과 슬픔에 후회를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또 하루 밤을 보내다 잠결에 그 장정을 또 만났다. “이래도 말을 안들이니 네 고집도 보통이 아니
구나 너 이놈 둘째 놈까지 잡아가야 정신 차리고 항복 할래”하며 사라진다.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에 어린 둘째가 세상을 떴다. 기가 막일 일이다. “다 된 집을 뜯어야 하나? 어린 자식을 둘이나 잃은 이 마당에 또 무슨 짓을 할까?” 네 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하는 마음이 굳어지면서 기와를 얹어 지붕을 마무리하고 또 밤을 맞았다. ‘ 그 놈이 역시 또 나타났다. 네 고집도 대단 하구나 내 고집 보다 더 세니 내가 물러나마“ 하고 사라졌다. 이럴게 해서 양보 받은 집이 완성 되고 이곳에서 다시 4형제를 두었으니 그 맏이가 수성(신미대사-혜각존자) 둘째 수경 셋째 수온(괴애) 넷째 수화로 모두 조선 초 위대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분들이다.
지관의 예언대로 당대에 훌륭한 아들이 입신양명하여 세종대왕의 총애에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을 한 신미대사(수성)와 월인천강지곡을 지으시고 월인석보 몽유도원도제문 상원사 중창기 상원사 중창 권선문(국보 292호) 금간경 원각경 번역 등 100여 가지의 작품을 남긴 조선 초 4대 문장가인 김수온과 성주 목사를 거쳐 한성부윤 김수경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지낸 김수화 4형제가 이곳에 살적에 터가 드세어 밤이면 밖에서 괴상한 소리가 시끄럽고 부엌 솥뚜껑이 들먹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는 날이 비일 비재하여 이사를 하면서 이웃까지 없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농토로 변하였다. 이곳에 사대부가에서 쓰던 고려자기 그릇 파손 유물이 개천에 무수히 굴러다닌다.
2. 왕의 기운
초선 초(태종) 영의정 하륜이 태종을 도와 태조를 상왕으로 물러앉게 하고 수많은 정적들을 단호하게 제거하고 후환을 없이 한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기에 자신의 외친이었던 남룡과 그의 자식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 1인 지상에 만인지하의 자리를 누리고 있을 때 남녘의 밤하늘에 기묘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저 것은......왕의 기운이 아닌가!?’ ‘남쪽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것은 아주 불길한 조짐이 이다‘ 당연히 왕기는 대궐 안에 있어야 했다. 다른 어떤 곳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것은 새로운 왕조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조짐인 것이다.
3. 왕, 아니면 부처
* 행도 화상
그 무렵에 자모산 연봉사에서 50대의 슬려 한 사람이 역시 남쪽 밤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하고 있었다. ‘왕의 기운이라 ... 왕조가 바뀐 지 3대를 넘지 않는 지금, 새로운 왕의 기운이 나타남은 무슨 연고 인가?’
고려의 중심사상이었던 불교는 쇄약해지고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왕조로 다시 한 번 세상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믿어 왕사의 자리마저 사양하고 이태조를 따라 역성의 혁명을 성공시킨 무학대사의 기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강력한 유학자들의 거센 바람에 불교는 새 시대의 뒷배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유학자들은 한 번 얻은 기회를 놓칠세라 불교의 씨를 말라버리려고 안간 힘을 다했으니 절의 숫자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줄어들었다.
과거칠불(過去七佛)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이어져온 불법의 맥이 행도의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석가모니의 법을 이은 가섭존자...인도의 지공화상과 중국의 평산선사로부터 모두 법을 이어 행동으로 법을 가져온 나온...혜근(慧根)...그리고 그 뒤를 이은 무학 자초(無學 自初)...行道스님이 금장암에서 무학 대사 입적을 마치고 이름 없는 걸승의 행색으로 이산 저산의 암자만을 전전하며 때를 기다리던 그가 십여 년을 떠돈 끝에 머문 곳이 바로 자모산 연봉사였다. 이곳에서도 이름 없는 중으로 처신하며 남쪽 하늘에 푸르스름한 제왕의 기운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을 보다 북방에서 내려온 붉은 기운이 그 왕기를 비수와 같은 형상으로 침범하고 있었다. 시각이 급하다 남쪽으로 달리자...다다른 곳이 영동(영산) 용산 상용리 오얏골(괴애골=고야골, 서당골)을 지나 황간 반야사에 이르렀다.
4. 밀명
* 구륙
조선 개국 후 관직을 받지 않고 두문동에 은거하던 고려문신 -차원부의 일가족을 몰살하라-는 하륜의 명을 받고 3년에 걸쳐 추적 끝에 기어코 지리산에서 그들을 벤 일의 공로로 하륜대감에게 신뢰가 두텁게 맺어진 인물이다.
하륜이 머리라면 구륙은 손발이라 할 만큼 아끼고 믿는 이유는 무술뿐 아니라 말이 적고 특별한 감각(냄새)으로 일을 처리하며 대감에게 위해가 될 일은 절대 남기지 않는 위인이었기에 “영산(영동)으로 내려가 범상치 않는(손바닥에 임금 王자) 남자 아이를 찾아 출가한 아이가 아닌 바에는....베어라” “출가 했다면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니 베지 않아도 된다.”라는 밀령을 받고 바랑 속에 수족 같이 써 오던 두 자루의 칼을 숨기고 충청도 영산(영동) 땅 용산이라는 곳을 찾아 떠났다.1)
5. 아이들의 운명
행도 화상은 산세가 용과 같다하여 용산(龍山)이 있는 용두봉 아래 조촐한 기와집 한 채에 이르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사대부의 품격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집, 서산에 해가 진 뒤라 어둠이 묻은 대문 밖에서 허름한 도포차림의 걸승의 목탁 소리에 초로의 여인이 별 말 없이 그를 맞았다.
“지나던 길에 물 한 목음 얻어 마시려 들렸습니다.” 걸승이 툇마루 걸쳐 앉으며 말하자 여인은 미소를 띠며 물을 떠다 올렸다.
“날도 저물어 가는데 저녁도 드시고 쉬어 가시지요.” 하고 권하니 지나가는 말인 듯 “자녀들은 어디 있나요?” 하며 “맛있는 물을 대접 받았으니 아이들 관상을 한 번 봐 드릴까 합니다만....” 낯선 이의 기척을 느낀 아이들이 미리 방문을 열고 삐죽 얼굴을 내 밀고 있다가, 인사드리라는 어머님의 말에 밖으로 나와 스님에게 절을 하였다.
‘큰 애는 열다섯 살 수성(守省)이고요, 둘째는 열한 살 수경(守經), 셋째는 아홉 살 수온(守溫), 넷째는 수화(守和)라 합니다. 성은 김가이고요.’
행도는 행도스님은 네 아이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부인은 참으로 복이 많소이다. 커다란 기둥을 넷이나 품고 계시니...아이들의 아버지가 우선 높은 자리에 오르셨을 터이고...두번째 셋째 넷쩨 모두 관직에 오를 것으로 보입니다.” 하며 되는대로 자란 수염을 손가락으로 꼬며 나직하게 말 하였다. “그런데...장남 수성이는 말씀 드리기가...” 이 말을 들은 이씨(麗興) 부인은 조바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6. 손바닥의 비밀
구륙은 용산에 들어서면서 말에서 내렸다. 은밀히 하는 일이기에 수행원과 말은 동려 보내고 혼자서 흑립을 눌러 쓰고 간단한 바랑 하나 뒤로 맨 채 어둠이 내리는 길을 휘적휘적 걸으며 제왕의 기운 속에 깊이 들어 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행도 스님은 수성의 손을 가리키며 “손을 펴 보거라” 한다. 수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행도를 똑바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두 손을 더욱 꼬옥 쥐고 있었다. 어머니가 절대 손을 펴지 말라는 말에 “어머니! 소자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왜 평생을 사람들 보는 데에서는
1) 태조실록 10권, 5년 1월 21일 을사 3번째 기사와 태조실록 11권, 6년- 부하 왜인 3명과 해안가 마을을 노략질하다가 관군에 잡혀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하륜대감을 만나 살려 주었고, 바로 하륜대감을 따라 한양에 와서 입궁하여 왕에게 후도 한 자루를 바치어 투항함으로 무술이 인정되어 쌀 30석과 콩 20석을, 반인2명에게는 의복-갓(笠) 각각 한 벌식응 내려 주었다.
조막손을 하고 살라야 하는지를...그리고 제 손바닥이 무슨 죄가 있는 것인지를,,.” 어머니의 한숨 소리와 고개를 돌리는 무언의 승낙에 천천히 오그라졌던 두 손바닥을 폈다.
손금은 칼로 새긴 듯 선명한 왕(王)자를 보고 행도스님은 무서운 눈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주시하고 있다가 역시 그렇구나 했다.
태어 날 때부터 손바닥에 임금 王자가 새겨 졌으니 불길한 생각2) 에 부모가 조막손으로 자라게 했다. 이씨 부인은 큰 비밀이 탄로난 두려움에 가득 차 외치듯이 물었다.
“그런 사실을 스님은 다 알고 오신 것입니까? 스님은... 누구 시길래...?”
“소승- 이 몇 백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 온 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무언가 좋은 방도라도 있다는 말씀이신지...?”
이씨 부인은 마지막 희망이 깨어질 새라 조심조심 물었다.
“소승에게 저 아이를 맡기시지요!”
행도의 단호한 말에 이씨 부인은 할 말을 잊고 입을 딱 벌릴 뿐이었다.
위로 두 아이를 잃고 어렵게 얻은 아이인데...짐승만치도 대접을 못 받는 이 시기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라니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하며 수성이 태어나기 전 이야기를 모두 다 했다.
“그러기에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집에 꼭 붙들고 있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뭔가 모를 살벌한 기운이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소승의 등줄기에 이미 서늘하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이씨 부인은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변하더니 결국 고개를 저으며 “바깥어른이 없는 지금 ... 그것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님께선 그런 말씀 접으시고 사랑채에 여장이나 푸시오. 저녁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아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행도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수성은 불안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을 하고 행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7. 먹이 냄새
흑립을 눌러 쓴 구륙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 속에 갈 바를 잃고 서서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비를 맞으면서도 한가롭게 그의 곁을 스쳐갔다. 가늘게 뜬 그의 눈이 순간 눈꺼풀 사이에서 번득였다.
그는 걸음을 빨리하여 소년의 뒤를 따르며 바랑을 옆구리로 돌려 손을 집어넣고 칼을 찾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칼집의 덮개를 재꼈다. 칼을 오른손에 쥐고 비속을 무심코 걷는 어린 아이의 멱살을 잡는 것을 조금 떨어져 뒤따라오던 어머니가 달려들어 말리려 하자 순간 여인의 심장을 찌르고 아이마저 찌르니 두 모자의 낭자한 피가 빗물에 엉켜 흥건히 흐른다.
8. 꿈속의 살인
구륙은 새벽녘이 되어서 눈을 떴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장면들이 꿈인 양 아스라하게 느껴졌다. 소매 끝에 묻은 핏자국은 그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길 옆 논두렁에 거적으로 덮어둔 두 구의 시체
2) 엤적 부터 임금왕(王)자가 몸에 있으면 왕기를 가졌다하여 살려 두지 않고 나라에서 죽였다 한다
가 생각났다.
구륙은 간밤에 마신 농주가 아직도 뱃속을 훌치고 있음을 느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물을 찾아 문을 열자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아...저 기운이 아직도...? 하며 물을 마신 후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9. 난입
먼동이 희부옇게 틀 무렵 시신을 발견한 것인지? 아랫녘에서 들리는 사람들 소리를 뒤로하고 ‘이렇게 기운이 역력하게 서려있는 집을 지척에 놔두고 엄한 애를 잡았으니...’ 중얼거리며 대문 앞을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구륙은 담장을 한 손으로 잡고 가볍게 몸을 날려 뛰어 넘었다. e자형 집-방은 세 개 인 듯, 눈을 번득이며 둘러보고는 작은 사랑채를 향했다. 문을 소리 없이 열자, 어렴풋이 세 아이가 자는 모습이 그의 시선에 들어 왔다. 대감께선 아이의 나이가 열다섯은 되었을 거라 했는데...?‘ ‘예상보다 나이들이 어리다.’ 찬 공기가 밀어닥쳐서인지 수경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누...누구세요?”
구륙은 등짐 속에서 칼을 손에 잡는 순간- 그의 눈에는 세 아이의 옆에 놓여진 주인 없는 베개를 보았다. 구륙이 머리를 회전하고 있는 사이에 등 뒤에서 인기천이 들렸다. 돌아보니세 아이의 엄마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요?” 수온과 수화도 깨어서 낯선 이를 보았다. 셋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엄마!” 이씨 부인은 세 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형은? 수성이는 어디 있니?”
구륙은 미간을 찌푸렸다. ‘형이라...?‘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구륙이 섬돌 아래 아직 젖어있는 흙 위에- 소년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데는 일초도 걸리지 안했다. 그 발자국은 사랑채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두어 걸음에 사랑채로 달려들어 문을 열어젖혔다. 방은 비어 있었다. 구륙의 핏발선 눈 아래 쪽지가 띄었다.
‘般若寺’ 구륙은 한자를 읽을 줄 모르는 무식자다. 쪽지를 이씨 부인에게 보이며 물었다. “뭐라고 씌어 있소?” 저승사자와도 같은 망나니에게 반야사라 가르쳐 줄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으니 수온이 “ 저 읽을 수 있어요! 반 야 사...!”
“황간에 있는 반야사 맞죠, 엄마?...엄마!”
수경과 수온 수화가 쓰러진 엄마를 부축하려할 적에 구륙은 수온의 볼을 한번 만져주며 말했다. “총명함이 너를 살렸구나.” 하며 돌아서서 휘적휘적 대문을 열고 나섰다. 문 빗장은 열려 있었고 문 밖으로 어른의 발자국과 아이의 발자국이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10. 살기 위해 깎아라!
한 밤중에 행도의 손을 잡고 얼떨곁에 따라나선 수성은 산길을 타고 반야사에 이르러서는 몸이 녹초가 되어있었다. 아니 밤중에 두 손님을 보곤 반야사의 주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이내 행도를 알보고는 깜짝 놀랐다.
무학대사의 법을 이으셨다는 행도스님에게 주지인 연희(衍喜)사문은 선 자리에서 엎드려 절을 올렸다.
“연희사문이 여기 있는 줄은 몰랐네. 내가 오늘 제대로 찾아 왔군, 이 아이를 이 절에서 머리를 깎아주려고 데려왔네. 수성아! 들어가서 주지스님께 절을 올리도록 해라.”
머리를 다 깎은 후, 대얏물에 머리를 씻어주고 나서는 행도대사도 피곤하였는지 요사채에서 눈을 붙였다.
‘아침이 되면 어머니는 내가 없어진 것을 아사고 얼마나 놀라실까?’ 아버지도 유배중인 이때- 장남마저 지집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어머니를 힘들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중에 절을 빠져나와 어머니에 가려다 구륙을 만났고, 구륙에게 잡힐뻔 했을 때 다행히 행도스님의 도움으로 다시 반야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11. 별리(別離)
행도는 다음날부터 연희스님에게 부탁하여 수성에게 불가의 모든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수성의 첫 스승은 만덕사(萬德寺) 주지였다가 지금은 반야사의 주지인 연희인 셈이다.
그는 당대의 선승이던 벽계정심(碧溪正心)과 더불어 『금강경』을 교정 간행했던 고승이었다. 그가 워낙 이론에 박식하여 세상에서는 그를 교학사라고 불렀다. 연희는 수성에게 절 하는 법, 예불문, 목탁 두드리는 법, 등과 저녁이면 부처님의 생애를 이야기해주었고, 행도는 대장경을 직접 설해 주었다. 그 중에도 반야경을 비롯하여 원각경이 있었고, 수능엄경이
있었으며 금강경이 있었다. 수성은 하나를 들으면 일곱 가지 기억이 깨어나는 특출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스승의 가르침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행도스님도 또한 볍기(法器)를 만난 기쁨에 하루해가 뜨고 저무는 것을 잊어가며 수성을 다듬어가고 있었다.
절에 올라온 수성의 어머니 역시 머리 깎은 자식을 보고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암살자를 대면해서 그 끄찍한 공포를 겪은 터라 차라리 자식을 부처님의 품에 맡기는 것이 더 낫겠다는 마음을 하게 된 연후였다. 이씨 부인은 자식을 남기고 떠나는 길에 마지막으로 돌아서서 근엄한 얼굴로 당부하였다. “수성아! 이왕에 머리를 깎고 출가했으니 반드시 큰 스님이 되어라.” “예, 어머니, 명심하겠습니다.” 모자의 눈에는 방울방울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남편 김훈은 진사에 오른 후에 문무에 고른 능력을 보여 왕세자의 지도까지도 맡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후- 조모가 돌아가시고- 그 빈소에 참여하지 않고 한양으로 올라갔다는 죄목으로 상소되어 터무니없는 중벌을 받아 전라도 내성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당했다. 이씨 부인이 아는 남편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이었기에 그녀는 너무나 억울했고, 기가 막혔다. 그런 와중에 남편과는 상의도 못한 채 장남을 출가시키게 된 자신의 심정이 너무나도 서러웠으니 아들이 보이지 않는 곳 까지 한참을 내려오다 이끼 덮인 바위를 끌어안고 한 없이 울었다.
12. 문자의 뿌리
행도 스님은 어느 날 수성을 불러 주지 스님께 경전을 잘 배워 두어라 하며 “너의 길은 지금 대승경전 공부를 충실히 해 두는 것이다. 나중에 긴히 쓰일 일이 있으리라. 나는 미처 못 마친 본성의 일을 마차고 돌아 올 것이다.” “그 뒤에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 또 있을 것이다.” 말을 남기고 떠나셨다.
스승 행도스님이 어디론가 떠난후 수성은 경전 공부를 꾸준히 해 나갔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스승은 돌아오지 않아 2년의 세월이 지난 후 마침내 행장을 꾸려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나게 에 이르렀다. 사문의 행로는 일정치도 않고 막연한 것-
몇 개월을 헤맨 수성은 남해의 어느 산길을 걷다가 사냥꾼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서 나오기 위하여 안간 힘을 다했으나 미끄러지기만 반복하다 기진맥진 하여 쓰러지고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려 탈진한 상태로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눈을 떠 보니 눈 앞에 밧줄이 하나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서 밧줄을 붙들고 올라와요! 정신 차리고 어서요!“
꿈속인 듯 아득히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수성은 밧줄을 붙들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구해준 이는 놀랍게도 삼십대의 곱상한 여인이었다. 여인은 수성을 데리고 자산이 가고 있던 산사를 향했다. 그 곳에서 언 몸을 녹이고 빈속을 채우니 정신이 들었다. 법호가 자심월 이라고 밝힌 그녀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큰 스님을 소개해 주겠노라고 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큰 스님은 산에서 약초 망태를 메고 내려왔다. 수성은 그의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부르짖고 말았다. 그가 바로 꿈에도 못 잊던 스승 행도대사였던 것이다. 엎드려 절을 하고 다가서서 스승의 거친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열여덟 살이 된 수성은 반야사에서 연희스님을 떠나 여러 사찰을 순례할 대 이름도 없는 사당에ㅔ서 무학화상의 진영을 참배하며 일주일을 머물고 있을 때 꿈에 신인을 만나 얻은 알 수 없는 문자가 빽빽이 적힌 책을 행도스님께 보여주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것은 고대의 불경이었고 그 문자의 이름은 실담문자라 했다. 또 하나의 글은 신지문자라고 했다.
“너느 이 문자를 가슴에 새겨 두어라! 이것을 익혀 나중에 인연 있는 제자에게 전하여라! 세상을 위해 크게 쓰이리라.” 하고 행도는 그 곳을 떠나 남해정사에 머물다 수성을 데리고
속리산으로 향했다. 이후 범어와 실담문자 산스크리트문자 신지문자를 터득하고 연구하여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정의공주 안맹담(정의공주의 부군)의 도움울 받아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었다.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 세종대왕이 훈미정음 창제의 공적을 치하하여 불상을 하사하였고 세조가 복천암 신미대사의 초청을 받아 거행할 때 정 이품 송의 벼슬이 붙었으며, 피부병을 고친 곳이다. 신미대사가 이곳에서 열반에 드셨으니 대웅전에 화상을 모시고 바로 앞에 부도탑을 모시고 있다. 주지스님은 월성스님이다.
부도탑 보물
1416호 *불교의 맥 지공화상(천축국)-나옹화상(고려)-무학대사-행도화상-신미대사
*차고 자료 ; *끄리 책 1권 *복천사적기 *조선왕조실록 * 영산김씨 족보 *복천보장
*신미당 일기 *안맹담(안씨 족보)